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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9 x 19 mm 파라블럼
전체무게: 4.34 kg
전체길이: 851 mm
총열길이: 203 mm
장탄수: 32발, 50발 박스형 탄창
발사속도: 분당 600발


2차 세계대전 초반 연이은 패전은 물론 덩게르크 철수작전으로 유럽 본토 내 기점을 잃어버린 영국은 독일을 포함한 추축군의 본국 침공이라는 야욕을 막기 위해 철수작전이 끝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방어전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본토 사수라는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던 영국군은 끊임없는 물자부족으로 인하여 이도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겪었는데, 이러한 난감한 상황은 그 당시 영국군이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그저 본토 사수만 가능하다면 어떠한 시도라도 해보는 저돌적인 자세를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지요. 란체스터 기관단총도 이러한 결과물들중 하나였습니다.

란체스터 기관단총의 개발역사는 덩게르크 철수작전 이후의 영국군의 경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과의 보병단위 전투에서  기관단총의 실용성을 처음 깨닫게 된 영국군은 철수 직후 곧바로 자국산 기관단총 개발에 착수하였지만 물자적 부족이라는 난관과 더불어 기관단총에 대한 제대로 된 개발 노하우가 전무한 상황에서 이후 영국군의 제식화기로 선정될 스텐 기관단총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몇몇 군사조직들은 이를 기다리는 대신 기존에 있던 것들을 재활용하거나 배껴쓰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들의 눈에 들어온것은 바로 주적인 독일군이 쓰고 있던 MP28입니다.


MP28 기관단총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최초의 실용적인 기관단총으로 인정받은 MP18 기관단총을 개량한 물건으로, 나중에 MP40 같은 걸출한 기관단총을 개발한것으로 알려진 휴고 슈마이저의 지휘로 만들어진 화기였습니다. 간단해진 탄창과 자동/반자동 셀렉터를 탑재함으로서 약간이지만 성능 향상을 염두하고 만들어진 MP 28는 그 당시 나온 물건들중 가장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기관단총이였다는 것은 사용하고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 이를 접한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였는데, 비록 적군의 화기이기는 하지만 물불 가릴새가 없었던 영국군은 이를 카피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란체스터 기관단총(란체스터라는 이름은 해당 화기의 생산을 맡았던 스털링 조병창의 책임자인 조지 허버트 란체스터의 이름을 따서 명명)은 영국군을 위해 만들어진 MP28의 카피판이지만, 사실은 영국 육군 보병들이 사용하는것을 염두한것이 아니라 영국 공군이 비행장을 지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무기입니다. 하지만 개발 당시 영국 육군도 스텐 기관단총이 나오기를 무작정 기다릴 바에는 이것이라도 쓰겠다는 심정으로 개발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작 란체스터 기관단총을 가장 많이 쓴 부서는 육군이나 공군이 아닌 해군인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 영국군의 사정은 눈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는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MP28의 단순한 카피형으로 나온 만큼 란체스터 기관단총은 기본이 되는 물건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단순 블로우백이라는 작동방식이나 좌측에서 탄창을 급탄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던가 등등) 기관단총에 쓰이는 목재 개머리판이나 총검 장착대는 리-엔필드 소총의 것을 강하게 참고하기도 하였고, 이후 나온 개량형 버전(Mk.1)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생산할 수 있게 자동/반자동 셀렉터를 없애고 조준기를 단순화 시키는등 영국군이 필요로 하는 몇몇 특징도 도입했다고 하는데, 복제도 철저히 한 덕분에 성능상으로는 기본작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좋은 물건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란체스터 기관단총은 1941년 중반 첫 5만정 생산을 시작으로 1943년 말까지 생산을 지속하였고(28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매달 약 3,400정씩 생산한것으로 추산), 이 당시 만들어진 물건들은 영국 해군같이 기관단총의 수요가 은근히 많은 곳에 요긴히 쓰였습니다. 영국 해군은 란체스터 기관단총을 예비물자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 가지고 있었고, 쓰지 않는 물건들은 콜렉터들에게 팔거나 이를 필요로 하는 타국에 판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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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중량: 2.5톤
전체길이:
17 m
생산댓수: 약 5대
운용인원: 300명(운반), 8명(조작)
최대사거리: 약 30 ~ 40미터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개발과 구상이 끝났지만 정작 실전에서의 대량사용은 한참 지연이 된 화염방사기는 처음 참호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을때 병사들에게 공포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실제 사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능을 떠나 불을 뿜는 병사라는 이미지는 화염방사기가 확실히 적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데 좋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심리적인 장점과는 다르게 이 물건은 대량으로 쓰여도 좋을 만큼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화염방사기가 같은 시기 처음 대량으로 쓰여 군 개인화기 개발사에 큰 영향을 미친 기관총과 다르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에는 화기의 한계점이 큰 몫을 차지하였습니다. 보병이 휴대할 수 있게 만든 화염방사기는 발사시간이 굉장히 짧거나 아니면 사거리가 짧은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고 해서 발사 지속시간과 사거리를 늘린 물건을 만들자니 보병 여러명이 이를 운송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고 할 수 있는데, 제대로 된 절충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1차대전 당시 등장한 리벤스 대형 화염방사기는 이러한 보병용 화염방사기의 성능상 한계를 해결하고자 등장하였습니다.


영국군 공병 출신 장병인 윌리엄 하워드 리벤스(William Howard Rivens)는 1차대전 당시 뛰어난 아이디어 제공으로 인해 화학전과 화염방사기 개발에 큰 도움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만든 리벤스 대형 화염 방사기는 사거리나 성능을 희생시켜 보병용 화염방사기를 만들 바에는 차라리 대형 화염방사기를 만들어 제대로 된 성능을 구현하도록 하자는 발상을 통해 개발되었고, 실제로 리벤스 화염방사기는 개인단위로 운반이 불가능하게 커진지라 300명의 병사들이 전선으로 분해된 화염방사기 부품을 나르고 8명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이를 조립 및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리벤스 화염방사기는 시제품 4대가 1916년 처음 솜 전투 당시 참호간의 처음으로 시연을 보일 예정이였지만 독일군의 포격으로 인해 4대중 2대가 부서져 버린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4대중 온전히 남아있던 2대는 공세시작 직후 사용이 되었고, 리벤스 화염방사기가 배치된 지역은 영국군이 적은 사상자만으로 최전선 돌파에 성공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리벤스 화염방사기가 운반하기 힘든 만큼 제 몫을 해냈다는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지요.


솜 전투 이후 1917년 벨기에 딕스마이데(Diksmuide)시 근처 공세 당시에도 쓰인 기록이 존재하는 리벤스 화염방사기는 그 성능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참호전에서 쓰려면 무인지대(No Man's Land, 적군과 아군 참호간의 평지를 지칭하는 단어) 아래로 화염 방사기를 묻을 수 있는 터널을 파야한다는 번거로움과 더불어 실제 성능이 대량생산을 해야할 수준으로 보이지 않다는 평가에 의해 솜 전투와 딕스마이데시 공세 이후 생산 및 사용이 중단되었습니다(이후 버려진 리벤스 화염방사기는 2010년 5월 영국에서는 부품을 모은 몇몇 전문가에 의해 실제 성능이 구현된 모델이 재등장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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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9 x 19 mm 파라블럼
전체무게: 3.98 kg
전체길이: 732 mm(개머리판 펼쳤을때) / 552 mm(접었을때)
총열길이: 198 mm
장탄수:  28발 박스형 탄창
발사속도: 분당 500발
작동방식: 단순 블로우백



세계 1차대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었고 실전에서 호평을 받은 기관단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2차대전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기관단총이라는 범주에 대한 성능상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거리가 일반적인 소총이 가지고 있는 사거리보다 훨씬 짧았다는 점은 근접전에서의 화력만큼은 소총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기관단총이 상대적으로 위력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연합군이건 추축군이건 진영을 가리지 않고 자국산 기관단총을 개발하거나 타국의 기관단총을 배껴서 쓰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하였습니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라는 위치에 있었지만 강대국들의 위상에 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한 호주는 영연방 소속 국가중 하나였고, 태평양 전선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일본군에 맞써서 싸워야 하는 호주군은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기관단총에 대한 수요가 존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호주군은 영연방 소속이라는 특징을 살려 영국군이 그 당시 쓰고있던 스텐 기관단총을 받아서 쓰는것이 당연하겠습니다만, 이 당시 영국군은 스텐 기관단총을 영연방 소속 국가들한테 대량으로 지급할 만큼 넉넉한 병기사정을 가지고 있질 않은지라(애초에 스텐의 개발이유가 영국군 병기부족의 결과였습니다), 호주군은 어쩔 수 없이 자국산 기관단총에 대한 개발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오스텐 기관단총(오스텐은 "오"스트레일리아제 "스텐"을 줄인 명칭입니다)은 호주군이 쓸 기관단총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개발되었지만 호주군에 맞춰서 개발되는 신형 기관단총이 아닌, 이미 존재하고 있는 화기들의 특징이나 외관상 구조를 최대한 많이 참고하여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오스텐 기관단총이 개발될 당시 참고가 된 기관단총은 영국군이 썼던 Mk.II 스텐과 독일군이 사용한 MP-40로 알려져 있는데, 이 화기들로부터 물려받은 특징은 아래와 같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텐으로부터 받은 특징: 총열, 리시버(혹은 총몸), 방아쇠 구조
MP-40로부터 받은 특징: 접이식 개머리판, 노리쇠, 공이, 그리고 왕복 용수철용 덮개


오스텐 기관단총은 MP40와 스텐의 특징을 꼽아 만들었지만 단지 카피작이라고 보기에는 독특한 특징들도 포함하고 있었던걸로 유명합니다. 이 화기의 독자적 특징이라면 반동제어를 위한 수직 손잡이가 기본적으로 부착되어 있다는 점(그리고 이 손잡이 안에는 청소용 도구가 수납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몇몇 부품은 다이 캐스팅 주조방식을 사용하여 생산성은 물론 생산단가도 낮췄다는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것도 모자라 개량형까지 개발되었던 오스텐 기관단총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오스텐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총 자체의 성능이 너무 나빴다기 보다는 같은 시기 호주군을 위해 만들어진 오웬(Owen) 기관단총의 성능이 너무 높게 평가되었다는 것이였습니다. 오웬 기관단총은 정글전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아무런 고장 없이 잘만 작동해주는 놀라운 신뢰성을 보여준 반면에 오스텐 기관단총은 그런 인상을 심어주진 못한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주군의 오웬 기관단총 제식 채용으로 인해 더이상 구매의사를 보이는 나라가 없어진 오스텐은 2만정이 안되는 생산량을 마지막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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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410 산탄
전체길이: 767 mm
총열길이: 640 mm
장탄수: 1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리엔필드 소총을 주력으로 운용하던 영국군은 리엔필드에 대한 생산권을 자국뿐만 아니라 영국제국의 산하에 있던 영연방 국가들(혹은 식민지들)에도 제공하였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라이센스 제공은 수많은 영국 연방 소속 국가들이 1/2차 세계대전은 물론, 영국군이 냉전 초반 L1A1 소총을 채택한 이후에도 계속 리엔필드를 주력으로 운용하거나 생산하는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국 식민지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인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도의 경우 영국으로부터 리엔필드 소총을 직접 받아서 쓰기보다는 직접 공장을 차려 생산하는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 판단되어졌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이샤포어(Ishapore) 조병창같은 군수무기 생산공장이 인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1947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에도 이샤포어는 7.62 mm NATO급으로 재탄생한 리엔필드 소총(제식명 2A1)을 생산 및 판매할 정도로 리엔필드 소총의 생산에 대한 노하우, 혹은 일가견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대형 공장의 존재와 더불어 오랫동안 생산을 했다는 시기적 특징 덕분에 그 당시 인도 내에서 리엔필드 소총을 목격하는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였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국내 치안사정에 대한 해결을 리엔필드 소총만 가지고 해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불안정한 시기였던 1900년대 초반 인도의 경우 수많은 사건들로 인해 전투경찰이나 교도관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이들이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범주의 화기는 소총이 아닌 산탄총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지급할 수 있는 신형 화기에 대한 개발이 절실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수요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것이 바로 이샤포어 조병창의 리엔필드 산탄총입니다.

이샤포어 조병창의 신형 산탄총이 개발하는데 있어서 중요시한 최우선 과제는 바로 이미 인도 내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리엔필드 재고품들을 재활용하는 것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리엔필드 소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으면서 단순한 개조로 산탄총으로서의 성능을 구현하고자 한것이 바로 이샤포어 .410 산탄총의 기본 컨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샤포어 산탄총들은 리엔필드 소총의 부품을 대부분 그대로 활용하면서 기존의 .303 브리티시 탄약에서 필수적인 부품들만 교체해서 .410 산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다만 이 컨버전 과정에서 .303 소총탄용 탄밀대와 스프링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샤포어 산탄총은 단발장전만이 가능합니다)


이샤포어 조병창의 .410 산탄총은 각인으로 보았을때 최소 1920년대 초반부터 1940년 후반까지 생산 및 사용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언제까지 쓰이다가 퇴역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투경찰이 폭동을 진압할때, 그리고 교도관들이 교도소 내 수감자들에 대한 경계를 설때 쓰다가 이 보다 더 좋은 화기가 배치됨에 따라 이샤포어 산탄총들의 상당수는 퇴역 이후 미국의 민수용 총기시장에 들어와 판매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다만 그 당시 이샤포어 산탄총에 쓰이는 .410 산탄은 미국 내 .410 산탄과 많이 다른 물건인지라 수입과정에서 또다른 컨버전 절차가 진행되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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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6.5 x 50 mm SR 아리사카
전체무게: 3.95 kg
전체길이:  1,280 mm
총열길이:
781 mm
장탄수: 5발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군의 일원이였던 일본 제국이 38식 아리사카 소총을 보병용 제식화기로 사용한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총 생산량이 약 340만정이나 되는 아리사카는 그 생산량이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30년대 말에는 일본군의 수요를 100% 충족할 수 있을 만큼이 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2차대전 초반 38식 소총의 대부분은 만주를 침공하는 주력군인 일본 육군에게 대부분 지급되는것이 일반이였고, 신형 소총에 대한 배치순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일본 해군은 아리사카에 대한 배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습니다.

직접적인 보병단위 전투가 많은 육군이 해군보다 소총을 더 일찍 받는것은 당연한 것이고, 소총에 대한 배치가 느려진다고 해서 해군의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것이 일본군의 공식입장이였습니다만 일본 해군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쉽게 아리사카 소총에 대한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배치속도를 늘리는것은 불가능한 것이였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일본 내에서 생산되는 소총이 아닌, 해외에서 만든 총을 가져오는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신형 소총 개발 프로젝트에 참가한 나라는 다름아닌 이탈리아였습니다.


1937년 말 추축군에 포함된 이탈리아는 구 소련이 침공하는 상황이 발발할 시 추축군 참가국들이 서로를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은 방공협정(혹은 반코민테른 협정)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게 되었는데, 이 방공협정은 단순한 군사적 협조뿐만 아니라 군사적 물자에 대한 조달이나 요청도 포함되어 있던지라 일본 해군은 이 조약을 기반으로 이탈리아에 새로운 소총에 대한 개발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방공협정에 따라 이탈리아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본 해군이 쓸 새로운 소총에 대한 개발을 시작하였고, 1939년 완성된 디자인을 내놓기에 이르렀는데, 이 물건이 바로 I식 소총입니다("I"는 숫자 1이 아니라 알파벳 "I(아이)"입니다)

I형 소총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지만 일본 해군이 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38식과 이탈리아의 칼카노 소총이 혼합된 물건으로서 개발되었습니다. 실제로 I식의 노리쇠 구조나 작동방식은 칼카노 소총의 것을 재활용하였지만 개머리판이 포함된 총의 몸통과 탄창의 구조는 38식 아리사카 소총의 것을 답습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다만 일본군 소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리시버 상부의 국화문양은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두 볼트액션 소총의 디자인을 혼합했음에도 불구하고 I식 소총은 실제로 사격을 할 시에 아무런 구조적 결함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I식 볼트액션 소총은 1938년 생산을 시작으로 1939년까지 약 8만정이 생산되었는데(이중 4만정은 베레타에서, 나머지는 이탈리아 정부 소속 조병창에서 생산) 이중 대부분은 1941년 이전에 잠수함이나 배를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으며 이를 요청한 일본 해군 소속 병사들에게 지급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I식은 2차대전 당시 콰잘레인 환초나 필리핀에서 미군에 의해 노획이 되어 다수가 미국 내 민수용으로 들여와졌는데, 일본과 이탈리아 같이 비교적 2차대전 당시 유명하거나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국가의 소총이 아닌만큼 이러한 총기를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콜렉터가 아닌 이상 큰 인기가 있지는 않은 물건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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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8 x 22 mm 남부
전체무게: 3.5 kg(50발 탄창 장착시)
전체길이: 641 mm
총열길이: 229 mm
장탄수: 50발 박스탄창
발사속도: 분당 600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전쟁을 치룬 많은 국가들은 기관단총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권총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거리라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자동발사로 근접전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이 물건은 그 당시 쓰이고 있던 보병용 소총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능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는 2차대전이 시작되는 시점에 가서는 대다수의 강대국들이 자의적이나 반 강제적으로 기관단총을 제식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기관단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2차대전 당시의 일본군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쓴 제식 기관단총인 100식 기관단총이 그리 많은 양이 생산되지 않았고, 그나마 생산된 양도 특수부대나 공수부대쪽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 기관단총이 그런 대접을 받게 된것은 그 당시 일본이 가지고 있던 기관단총에 대한 이해 부족도 있지만, 기관단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일본군영의 편견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상부가 기관단총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것과 다르게 일본군에서는 기관단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차대전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은 해외에서 생산되고 있던 기관단총(혹은 그 당시의 명칭으로는 기관권총)을 수입하여 이 물건들에 대한 작동방식을 연구하고 있었고, 그런 모델중 하나인 SIG사의 7.63 mm급 기관단총인 모델 1920(Model 1920)은 2차대전이 시작된 이후 동부전선에서 소수이지만 사용될 정도로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기관단총의 관심, 혹은 사랑은 다른 나라들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기관단총을 수입해서 사용하는것은 어느정도 한계가 있는 선택입니다. 자국산 화기를 사용하는것보다 가격도 비싸고 해당 화기를 생산하는 국가와의 외교적 수준에 따라 수입량이 차이가 날 수도 있는지라 1920년 말부터는 일본군영의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자국산 기관단총을 생산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개발의 선두주자에 있던 인물이 바로 키지로 남부였습니다.


일본군 개인화기 개발사에 있어서 빼먹을 수 없는 유명한 인물중 하나인 키지로 남부는 군용 화기라는 분야에서만 따져본다면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회사인 "남부-주 세이조쇼 K.K"사를 통해 1934년 일본에서 최초로 개발되는 기관단총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기관단총이 바로 2식-A형의 기반이 되는 1식 기관단총입니다.

1식 기관단총(2가지 버전이 있는데 모델 A는 분당 발사속도가 300발, 모델 B는 600발로 알려져 있습니다)은 그 당시 일본군이 소수나마 쓰고 있던 베르그만/SIG제 기관단총에서 쓰이고 있던 작동방식 그대로 사용하였지만 그 당시 나온 기관단총들과 비교하였을때 상당히 놀라운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래에 나온 사항들은 그 당시 1식 기관단총이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특징들입니다:

1) 권총 손잡이에 탄창이 들어가도록 설계하여 전체길이가 685 mm밖에 되질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권총 손잡이에 탄창이 들어가는건 체코제 Vz.23이 최초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남부의 디자인이 최초)
2) 권총 손잡이에 들어가는 탄창은 일반 박스탄창이지만 무려 50발이나 되는 장탄수를 자랑합니다
3) 탄창 끝에 접혀있는 철사 부품을 통해 특정 물체에 고정시켜놓고 지속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1식 기관단총은 이러한 특징들을 기반으로 1936년부터 1934년까지 군용 테스트를 받게 되었습니다만,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1식이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전체적으로 내구성이 좋지 못해 군용으로 쓰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점 때문이였는데, 총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던 테스트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키지로 남부는 1식에 대한 개량 및 수리 요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개발된 남부의 개량형이 바로 2식-A형 기관단총입니다.

1935년 10월 정식 특허권을 받게된 키지로 남부의 2식-A형 기관단총은 1식의 내구성 문제점을 개량하고 나왔어야 했지만 실제로 테스트 했을 시 일본군 관계자들의 눈에 들 만큼 좋은 성적을 보여주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1937년 8월 일본군 기병대가 다시 실험을 하고 개량사항을 요구할 정도로(특히 기병대의 경우 중국 내에서의 작전시 이를 소수지만 사용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해당 기관단총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높았고, 이러한 관심은 해외에서도 이어져 아직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던 1936년 1월에는 영국군이 군용 테스트를 위해 1정의 2식과 테스트용 1,000발의 권총탄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적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채용거부와 더불어 8미리 권총탄의 생소함으로 인해 생긴 해외에서의 판매 한계는 남부의 2식-A형 기관단총은 이렇다할 판매 실적을 보여주진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판매부진은 결국 남부사는 다른 화기들에 대한 생산을 이유로 해당 화기에 대한 생산을 전면 중지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이후 100식 기관단총의 생산량이 모자라 다른 기관단총의 채용을 생각하고 있던 일본정부의 요청으로 인해 2식 기관단총에 대한 재생산이 잠시나마 언급되기도 했습니다만 이 마저도 전시상황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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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1.02 kg
가로길이: 75 mm
세로길이: 150 mm
사용폭약: 암모날/TNT 혼합물
폭약량: .45 kg



2차대전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은 개전 초반, 패전을 거듭하던 영국 대륙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유럽 본토에서의 연합군을 빼내기 위해 지상 최대의 탈출작전인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작전은 다른건 몰라도 유럽 본토내에서 말살위기를 막고 있는 연합군 병사들을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빼낸다는 계획이였는데, 작전 초기 의도치 않게 생긴 독일군의 진격 지체와 더불어 영국에서 영국군 구출을 위해 나온 자원 철수인력 덕분에 영국은 30만명 이상의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키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마친 영국에게는 또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의 영국 본토침략 계획과 물자부족이라는 상황이였습니다. 철수작전 당시 30만명 이상의 대병력을 빼내오자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철수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전선에서 쓰이던 각종 중화기나 대형장비를 어쩔 수 없이 버리게 와야했고, 이 때문에 영국 본토내에서 독일군이 상륙을 시도할 시 쓰여야 할 방어용 장비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P.S) 그 당시 영국 육군 자료에 따르면 됭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프랑스에 버리고 온 대전차포는 구경을 따지지 않고 계산해보면 무려 840문에 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문제는 철수 이후 영국 본토내에서 곧바로 쓸 수 있었던 대전차포는 겨우 167문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그 당시 대전차포와 그에 쓰이는 포탄의 숫자가 너무 적어 영국군은 훈련 목적으로라도 실탄을 사용하는것을 한시적으로 금지해야 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영국은 영국군과 본토 방어용 병력인 홈가드의 대전차 능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부랴부랴 대전차 화기들에 대한 개발 및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가지고 있는 물자만 가지고는 예전에 쓰이던 대전차용 무기를 빠르게 만들어 영국군 전군에 보급하는건 말 그대로 불가능한 요구였고, 이로 인해 단기간내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저렴한 대전차용 무기를 개발하는것이 절실해지게 되었지요. No.75 호킨스 대전차 지뢰/수류탄는 이러한 절박한 영국군의 상황을 타개해주기 위해 나온 물건중 하나였습니다.

No.75 호킨스 지뢰는 그 당시 TNT를 채워넣은 No.73 대전차 수류탄과 흔히 끈끈이 수류탄(혹은 점착식 폭탄)이라 불렸던 No.74 대전차 수류탄과 함께 영국 본토 방어전에 쓰일 목적으로 나온 대전차용 수류탄입니다. 이 지뢰는 사각형 모양의 상자에 폭약을 집어넣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차량이 지나갈 수 있는 곳에 묻어두면 차량이 지나가면서 이 지뢰의 윗부분을 밟아 화학약품이 섞어 폭팔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특히 이 지뢰는 유사시에는 차량에 그냥 던져서 폭파시키는것도 가능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대전차 지뢰와 다르게 수류탄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는 특징이 존재했습니다.


호킨스 대전차용 지뢰/수류탄은 비록 영국 본토 방어전에서 쓰이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유럽 내륙에서의 작전당시 대전차용 수류탄이나 지뢰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였고, 추가적인 부품을 달아주면 여러개를 동시에 폭파시킬 수 있어 다리 붕괴나 벽을 부시는 폭파장비로도 사용이 가능한 덕분에 범용성이 높은 장비로 각광받게 된 물건이였습니다. 영국군은 2차대전이 한참 지난 1955년까지 호킨스 지뢰를 제식 장비로 사용하였고, 2차대전 당시 많은 양의 호킨스 지뢰를 받아 쓴 미군은 이후 이를 기반으로 M7 대전차 지뢰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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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도요정 자리야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2017.03.12 23:10 신고

    이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도 나오는데.ㅋ



사용탄약: .30-06 스프링필드
전체무게: 7.2 kg
전체길이: 997 mm
총열길이: 457 mm
장탄수: 20발 박스탄창
발사속도: 분당 500발

 
미국 내 범죄예방 및 종교적 이유를 토대로 1920년부터 1933년까지 지속된 금주법은 미국 내 주류시장에 대한 엄격한 단속을 의미하였습니다만, 실제로는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마피아와 경찰간의 경쟁이라는 부가적인 단점을 낳았습니다. 특히 금주법이 시작되기 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자동화기들은 민수용으로 비싸기는 했지만 아무런 제약없이 구입 및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돈이 많은 마피아들에게 주로 쓰이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경찰 조직이 범죄 조직보다 화력에서 밀리는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요.

물론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경찰조직들은 이 자동화기의 화력에서 밀리게 된 경찰들은 공권력 강화 및 마피아 진압을 목적으로 그들이 쓰고 있던 속칭 "시카고 타이프라이터"라는 별명을 가진 톰슨 기관단총을 구입하기 시작하였고, 미국 내 전반적인 강력범죄 수사를 담당하는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미 연방수사국)도 그 당시 국장이였던 후버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동화기에 대한 배치가 시작되었는데, 기대와 다르게 톰슨 기관단총의 전격적 배치는 그리 큰 변화를 가져오진 못하였습니다.


톰슨 기관단총은 자동화기를 특성상 근접전에서 적을 사살하는 점에서는 효율적이라는것이 입증되었습니다만, 권총탄을 사용한다는 특성상 약간의 장갑이라도 있는 차량이라면 제대로 된 성능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초반 대중에 널리 보급되고 있었던 민수용 자동차들의 경우 심한 경우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철모보다 더 두꺼운 문과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근접거리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상 차문을 관통하는것은 쉽지 않은 것이였고, 이는 다시 말해서 차량을 이용해서 치고빠지는 전술을 사용하는 마피아들에게는 경찰의 톰슨 기관단총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것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할 수 있지요. 콜트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찰을 위해 새로운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콜트 모니터 자동소총입니다.

콜트사의 경우 존 브라우닝이 개발한 M1918 브라우닝 자동소총(B.A.R)의 경우 2차대전 당시에는 전군에 보급되어 사용될 만큼 큰 인기를 끌은 물건이였습니다만,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군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인하여 큰 매출을 보여주진 못하였고, 이 때문에 많은 수의 B.A.R가 민수시장에 풀리는 결과를 낳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온 버전들은 군용을 그대로 민수용으로 판매하던 것인지라 무게나 부피라는 측면에서 사용하기 굉장히 껄끄러운 물건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콜트는 R80을 개발할때 FBI같은 사법조직이 범죄소탕이라는 목적으로 쓰는것을 염두하였고, 이는 콜트 모니터가 오늘날과 같은 외형을 갖게 된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R80 콜트 모니터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찰이 시가전에서 사용하는것을 목적으로 한지라 많은 부분에서 개량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개량을 뽑아보자면 전체적인 길이와 부피, 그리고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총열, 개머리판, 그리고 총열용 손잡이가 교체된것을 주로 들 수 있고, 이로 인한 반동제어가 힘들것을 염두하여 기존 B.A.R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염제동기(M1928에 쓰였던 컷츠 컴팬세이터 개발사가 만들었다 합니다)와 권총 손잡이가 설치된것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작동방식이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M1918 B.A.R을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에 굳이 따지고 보자면 B.A.R의 단순한 개량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31년 개발 완료 및 생산이 시작된 콜트 모니터 자동소총은 총 125정이라는 낮은 생산숫자를 기록하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중 대부분(정확히는 90정)이 후버 국장이 직접 시연사격을 하는것을 필두로 FBI에 의해 쓰이기 시작하였고, 그중 하나는 금주법 당시 대표적 범죄자중 하나였던 보니 & 클라이드를 매복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보니 & 클라이드 소탕작전 당시 쓰인 B.A.R와 R80들은 해당 인물들이 타고 다니던 차량에 대한 무력화를 위해 철갑탄을 장착하고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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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22 호넷(Hornet)
전체무게: 1.8 kg
총열길이: 360 mm
장탄수: 4발 박스탄창



전투기 조종사들은 대형장비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이로 인하여 최전선이건 후방이건 개인화기를 사용하는 일이 굉장히 드물기 때문에 제식화기를 지급받아 사용하는 일이 굉장히 드뭅니다. 하지만 전투기가 피격당해 추락당했을 경우 생존을 위해서 개인화기를 써야 하는 상황은 언젠가 생길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대비해 지급되는 권총같은 소형화기들은 조종사들을 위한 가장 이상적인 화기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사용할 개인화기들은 인간을 죽이는 목적으로 쓰이기 보다는 야생에서의 동물을 사냥하여 식량으로 쓰거나 위협적인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용도로 쓰는것이 일반적인데, 권총탄을 사용하는 권총들은 그 크기와 특성으로 인해 사거리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다는 한계점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소총이라는 물건이 존재합니다만, 조종사가 탑승하는 전투기의 경우 일반적으로 소총을 장비할 만큼 여유로운 공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의 성능을 낼 수 있는 생존용 화기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미군의 경우 2차대전 당시 이러한 요구에 응해 M4라는 이름의 생존용 소총을 만들었습니다.


M4의 경우 R&T사에서 개발한 M265 스포츠용 볼트액션 소총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는데, 사용탄약이 그 당시 운용되던 소총탄인 .30-06나 .30 카빈같은 물건이 아닌, .22 호넷이라는 상대적으로 소구경인 탄약을 사용한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2 호넷의 경우 성능만 따져본다면 오늘날 사용되는 .223 레밍턴(혹은 군용으로 5.56 x 45 mm)에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다시 말해서 M4 소총은 그 당시 사용되던 풀 사이즈 소총탄보다는 이론적으로는 약할지 몰라도 일반적인 군용 소총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목재 스톡이나 긴 총열, 그리고 반동제어를 위해 필요한 악세사리를 달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과 야생동물 사냥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한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지요.

M4 생존용 소총은 ,22 호넷을 사용한 괜찮은 성능과 접이식 개머리판을 사용하면 휴대가 굉장히 쉽다는 점 덕분에 미 공군에서 1949년까지 약 3만정이 생산 및 사용 되었고, 1950년대 초반 개발이 완료되어 실전배치가 시작된 M6 생존용 소총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정식으로 퇴역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까지 남겨진 M4 소총들은 민수시장에서 거래가 되고 있습니다(다만 총열의 길이가 상당히 짧다는 점 때문에 구입을 해야 할 시에는 ATF에 세금을 내고 정식 절차를 밟아야 구입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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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08 00:26 신고

    360cm면 3m.... 오타인가요

 


구경: 74 mm
전체무게: 8.0 kg
전체길이: 1.5 m
운용인원: 2명
개발년도: 1944년
생산숫자: 약 3,500정


[개발동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일본은 미국이 가진 막강한 전차들을 쉽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물량이 있다면 포병사격이나 전투기의 도움을 받아 전차와 교전을 할 수 있었지만 막상 보병단위 전투에서 전차가 등장했을 경우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살돌격을 감행해야 할 만큼 일본군의 대전차화기의 수요는 절박할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다급하게 대전차 화기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쓰던 바주카 대전차 로켓 발사기였습니다.

[개발과정]

M1/M9 바주카를 기반으로 개발을 시작된 일본의 대전차 로켓 발사기는 바주카를 그대로 카피해서 생산하기 보다는 일본의 기술력 및 생산력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게 변형이 되었습니다. 일단 대전차용 탄두가 안정적인 비행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장착하는 안정핀에 대한 설계를 미군의 바주카는 로켓 탄두에 직접 장착한것과 다르게 순간적으로 구경이 작아지면 이로 인하여 전진하고 있는 탄두가 회전을 시작하는 벤투리 법칙을 이용한 원형관을 제작하여 안정핀 없이도 로켓이 회전을 할 수 있게 만든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방식을 사용함으로서 4식 발사기나 탄두의 생산단가를 절약한것을 볼 수 있지요.

두번째 변형으로는 격발기구의 변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주카의 경우 초기형 버전에서는 배터리를, 그리고 실제 채용버전에서는 전자석을 이용한 격발기구를 사용한것과 다르게 4식은 기존의 일본군 편제에 있었던 81 mm나 91 mm 박격포 탄에서 사용되던 뇌관과 이 격발을 위한 공이치기식 격발기구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의 경우 바주카에서 사용되던 전자석 격발기구와 내구성이나 구조적으로 큰 장점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일본군이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려고 한 발상은 주목할만 합니다.

물론 이러한 특징을 제외하면 4식은 바주카에서 사용된 몇가지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3.5인치 발사기에서 사용되는 방식이였던 2단 분리식 발사기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여 휴대시 분해해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설계를 하였고, 발사용 튜브에 트리거 그룹을 같이 부착시켜서 운용시킨것을 대표적인 두 발사기의 공통점이라 볼 수 있지요.

P.S) 4식 대전차 로켓 발사기의 경우 일반적인 대전차 화기들과 다르게 99식 경기관총에서 쓰이던 양각대와 비슷한것을 사용하였고, 발사시 사수와 부사수의 경우 발사기가 향하는 방향에서 포복자세로 45도 각도로 몸을 틀고 사격하도록 권장한 것을 보았을때 발사시 로켓에서 나온 연기로 인해 사수에 대한 노출이 컸거나 로켓이 추진함으로서 생기는 화염이 생각보다 심각했을 수 있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실전운용]

4식 대전차 발사기는 1944년도에 개발이 완료된 이후 종전까지 3,500정 씩이나 만들어졌기 때문에 미군 전차에 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습니다만, 해당 화기의 실전운용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1945년 초반부터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패배한 일본군 진영이 유사시 본토내에서 사용하기 위해 해외에 주둔중인 일본군에게 지급하는것을 거부했기 떄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에 따라 해당 화기들의 생산 및 사용은 잠정 중단되었고, 미군의 주둔시기에 전량이 폐기처리된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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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303 브리티시
장탄수: 30발 박스탄창
발사속도: 분당 600발



두 국가가 전쟁을 치룰 시 총력전에 돌입한다는 가정하에 본토의 제공권을 지키는것은 상당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는 적의 침략으로 정부의 수뇌부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점도 있지만, 본토 내에서 군용 장비를 생산하고 있는 군수공장들의 생산라인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2차대전 말기 높은 수준 높은 기술이 첨가된 장비를 뽑아낼 수 있는 여건이 있어도 연합군의 공습으로 생산라인에 큰 차질이 빚어 결과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없었던 독일의 마지막은 이러한 제공권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제공권 보호의 중요성은 2차대전 말기 독일이 의도치 않게 좋은 예를 보여주었습니다만, 전쟁 초기만 해도 이러한 상황은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일어났었습니다. 2차대전 초기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프랑스가 함락되고 서유럽의 대부분이 나치 독일의 손으로 들어감에 따라 독일은 영국 본토에 공습을 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게 되었는데, 영국은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 1940~1941)으로 독일의 침략의도를 꺾을때까지 군수공장들이 폭격을 당해 생산라인에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문제점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지요.


이러한 군수공장 생산라인에는 대형장비들도 있었지만 리-엔필드 소총이나 브렌 경기관총 같은 개인화기들도 마찬가지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2차대전 당시 다양한 종류의 개인화기를 생산하고 있던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Royal Small Arms Factory)은 그 규모와 중요성으로 인해 독일 공군의 공습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던 상황이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전 초기 잇따른 패배로 개인화기 무장이 부실하다 판단되었던 영국 육군을 공습 걱정없이 무장시킬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었는데, 이를 위해 나온것이 바로 Besal 경기관총입니다.

Besal 경기관총의 경우 그 당시 영국군의 주력 경기관총이였던 브렌 경기관총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 물건입니다. 외관에서도 볼 수 있듯이 Besal의 경우 브렌과 상당히 비슷한 특징이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Besal 경기관총이 브렌을 대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이 폭격으로 인해 생산에 큰 차질을 빚어도 영국군이 충분히 무장할 수 있는 수량의 경기관총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비록 브렌 경기관총의 수요가 부족할 시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되긴 했지만, Besal의 경우 단순한 보완용 경기관총으로 개발되지만은 않았습니다. 비록 브렌이 경기관총으로서는 높은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자잘한 단점이 없는것은 아니였고, 기왕 보완품을 만드는 김에 브렌을 그대로 카피하기 보다는 약간이라도 개선점을 추가해보자고 한것이 Besal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개량 시도로 인해 Besal 경기관총은 브렌 경기관총보다 가볍고, 생산 가격이 더 저렴하며, 생산라인에서 조립 및 생산을 하는것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와 다르게 Besal 경기관총은 브렌과 같이 영국군 제식 경기관총으로 채택되는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는 Besal 경기관총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1940년 후반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습이 점차 줄어듬에 따라 새로운 생산라인을 가동하면서 부품 호환이 되지 않는 경기관총을 굳이 생산시킬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영국 정부에서 내려졌고, 이에 따라 Besal 경기관총은 프로토타입 제품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이 되지 않는 운명을 맞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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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기존의 리뷰 포맷이라면 타이틀 사진과 제원을 기재하고 해당 화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 합니다만, 한 소총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첨부된 형식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리뷰형식이 아닌 문서자료 형식으로 작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각 화기에 대한 제원과 사진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발배경]

해당 화기의 시초는 2차 보어전쟁 당시의 영국군이 처한 문제로 시작되었습니다. 2차 보어전쟁은 영국군이 남아프리카 내 지배권을 확장하고 해당 지역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그 당시 영국에 대항하는 트란스발 공화국-오렌지 자유국의 연합군을 처리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을 가르키는 말인데, 이 당시 영국군은 숫적 및 장비적 열세를 가지고 있었던 연합군을 제거하고 해당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 전쟁은 영국군의 완승으로 끝났지만, 전쟁당시와 전후 보고를 따져보니 영국군이 모든 전투 상황에서 우세하다는 것은 아니였다는게 드러났습니다. 그중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 당시 영국군이 사용하던 리엔필드 소총과 .303 브리티시 탄약이였는데, 영국군에 맞써서 싸운 연합군이 사용한 마우저 1895 소총이 사용하는 7 x 57 mm 탄약이 놀라운 정확도와 저지력을 보여준 반면 리엔필드에 쓰이는 .303 브리티시 탄약은 그렇지 못하다는것으로 판명이 났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 직후 리엔필드를 개조하여 새로운 탄약을 사용하는 소총을 개발하려 했지만, 소총의 노리쇠 디자인이 .303 브리티시 탄약이 아닌 독자규격의 탄환을 사용할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것이 판명났고, 이에 따라 1910년 영국 소화기 위원회는 영국군 제식 소총으로 새로운 작품을 채택한다고 발표하였고, 영국군 제식화기로 새로 채택될 소총의 요구조건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나온 사항들은 그 당시 영국 소화기 위원회가 제시한 소총의 최소 조건들입니다

1) 마우저 타입 소총들이 사용하는 노리쇠 디자인을 사용해야 한다
2) 개머리판이 일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3) 소총 탄약 규격이 기존의 브리티시 탄약보다 소구경이여야 한다


이에 따라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이 해당 제시조건을 받아들여 개발을 시작하였고, 디자인한 여러 프로토타입중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판단된 한가지 프로토타입을 1911년 개발을 완료하고 내놓게 되는데, 이때 내놓게 되는 화기가 바로 아래 나오는 Pattern 13 엔필드 소총입니다 (이름에 13이 들어가는 이유는 제식으로 채택되기 이전의 테스트가 시작된 시기가 1913년이기 때문입니다).


Pattern 13 Enfield



사용탄약: .276 Enfield
전체무게: 3.9 kg
전체길이: 1,200 mm
총열길이: 660 mm
장탄수: 5발 클립

P13 소총은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에서 나온 볼트액션 소총으로, 기존의 SMLE 리엔필드가 가진 노리쇠 구조가 아닌 마우저가 디자인하고 많은 국가들이 따라하기 시작한 마우저 패턴의 노리쇠를 사용한 소총입니다. 이 점 이외에도 위에서 언급한 일체형 개머리판을 사용하도록 디자인이 새로 도입되었는데, P13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은 노리쇠 구조도 아니고 디자인도 아닌, .276 엔필드라는 이름의 신형 탄약입니다.

.276 엔필드 탄약은 .256 탄약에 기초하여 나온 디자인중 하나입니다(.256 탄약의 경우 소구경 고속탄이라는 점은 .276 엔필드와 동일하지만, 소구경임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탄약의 경우 기존의 .303 브리티시가 가지고 있던 장거리에서의 명중률과 저지력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P13에서 쓰이게 채택되었다 할 수 있는데, 비록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은 엔필드 소총과 해당 탄약이 잘 맞아 떨어질거라 판단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는 못하였습니다.


세계 1차대전 당시 P13은 Rifle, Magazine, Enfield, .276-inch이라는 이름으로 제식으로 채택되어 쓰이기 시작하였지만,  최전선에서 리엔필드를 쓰다가 이 총으로 제식소총을 교체한 영국군 병사들의 평가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습니다. 기존의 .303 브리티시보다 장거리 명중률이 뛰어난것은 인정 받았어도 총구 화염이 심하기 때문에 사격하기가 힘들다는 점, 소구경 탄환을 빠른 속도로 발사하다 보니 총이 금방 달아오르고 총열에 새겨진 강선이 금방 마모가 된다는 점은 P13이 제대로 실전 테스트를 받지 않고 급하게 전선에 나온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애로사항들이 접수됨에 따라 영국군 상부는 영국 왕립 소화기 공장에 6가지 추가 디자인 개량형을 요구하였고, 실제로 해당 회사도 이를 받아들여 개량을 시작하였지만, 1차대전 당시 영국군은 새로운 탄약을 전쟁 중간에 도입하고 기존의 SMLE 리엔필드를 제식에서 퇴역시킬 만큼 엔필드 소총이 효과적인 물건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P13에 대한 추가적인 생산 및 배치를 중단하게 됩니다.


Pattern 14 (M1914 Enfield)




사용탄약: .303 브리티시
전체무게: 4.25 kg
전체길이: 1,175 mm
총열길이: 660 mm
장탄수: 5발 클립

비록 .276 엔필드 탄약을 사용하는 P13에 대한 생산은 영국군이 중단하였기 때문에 끝났지만, 전쟁 당시 영국군의 소화기 부족현상이 심한 관계로 기존의 리엔필드를 계속 생산하는것과 더불어 P13의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되, 사용 탄약을 기존에 쓰던 .303 브리티시로 개조하여 전선에 보급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게 됩니다. 이미 제식 생산을 위하여 P13용 생산 설비가 갖춰진것은 물론, 실제로 뽑아냄으로서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만큼 P13을 .303을 사용하도록 개량해서 만든다면 P13이 가진 단점들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인한 결정였다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등장한 소총이 바로 P14입니다.

P14의 경우 기존의 P13 시설을 갖추고 있던 영국 내 공장에서 생산하는것을 목표로 만들어졌습니다만, 그 당시 영국의 생산능력이 소화기 부족현상을 단시간 내에 해결할 수 없다 판단하여 영국은 같은 연합군 소속은 아니지만 영국을 원조하고 있었던 미국에게 P14에 대한 추가 생산을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에 있는 윈체스터와 레밍턴사가 P14에 대한 부품 생산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두 회사가 약 120만정의 소총을 생산하기에 이르렀지요.


P14은 P13에서 탄약과 약간의 개량만 거친 녀석인지라 기존의 P13이 가지고 있던 총알 관련 문제를 해결하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총 자체가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1차대전 당시 만들어진 볼트액션 소총으로서는 꽤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기는 했습니다만, 총을 받은 영국군 병사들의 경우 근접전에서 사용하기가 힘들며, 전체길이나 무게가 기존의 SMLE와 많이 달라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근접전이나 총을 들고 적진에 돌격할 걱정이 없는 저격수들의 경우 총열의 디자인과 조준기 시스템, 그리고 무게가 장거리 저격에서 SMLE 리엔필드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평가하였지요.

이러한 엇갈린 평가로 인하여 P14은 최전선 병사들이 사용하는것이 아닌 후방 전선의 예비군 병사들과 장거리 저격을 선호하는 저격수들에게 지급되었습니다만, 1947년 리엔필드보다 더 나을게 없다는 판단하에 정식 생산은 물론 제식에서 퇴역하는 수모를 맞게 됩니다.


M1917 Enfield



사용탄약: .30-06 스프링필드
전체무게: 4.17 kg
전체길이: 1,175 mm
총열길이: 660 mm
장탄수: 5발 클립

미국의 경우 1903년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제식으로 채택하였고, 총이나 탄약에 대한 아무런 불평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과 다르게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이 시작되고 나서 미군이 유럽전선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 M1903의 생산량이 유럽전선에 보내질 병사들의 숫자에 충족하기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고(1차대전에 미군이 개입하기 직전 M1903의 총 생산량은 84만정이였는데, 미국 내에 존재하는 보병이나 실제 유럽에 투입될 보병의 숫자는 기존 생샨랑을 웃도는 수준이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급하게 M1903의 부재를 메꿀 수 있는 소총을 찾게 되는데, 그때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M1917입니다.

M1917은 미군이 새로 개발한 소총이 아니라 기존의 P14을 .30-06 스프링필드 탄약을 쓰도록 개조한 물건입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영국군의 소화기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이 미국의 윈체스터와 레밍턴사에 P14에 대한 생산을 요청하였는데, 그 당시 2년도 안되는 시간 내 120만정이나 뽑아낸 P14을 판단해봤을때 기존의 M1903용 생산설비를 늘리는것보다 P14에 .30-06을 사용하도록 살짝 개조해서 뽑아내는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 판단한 미군의 기준에 따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U.S. Rifle, Caliber .30, Model of 1917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을 시작한 M1917은 미군의 예상에 맞게 빠른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17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M197 소총은 고작 1년동안 무려 210만정을 뽑아내는 기록을 세웠고, 이때 생산된 소총들은 유럽전선에 투입된 미군 병사 숫자의 75%을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 효율적이였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산량과 다르게 미군의 M1917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영국군에게서 문제작이라는 소리를 받은 P14을 그냥 탄약만 새로운 버전을 쓰도록 개량하였기 때문에 미군도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소총의 무게와 전체길이가 참호전이라는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1차대전 이후부터는 미국 저격수들이나 최전선이 아닌 병사들에게 지급되다 결국 M14의 도입으로 현역에서 퇴역을 하게 됩니다.



문서출처: 위키백과 & IMF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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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303 브리티시
장탄수: 10발, 20발, 65발 탄창



볼트액션이라는 방식을 사용하는 소총들은 수백년을 지나도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군용 개인화기 장르중 하나입니다. 간단한 구조와 높은 정확도를 사용하여 장거리 전투에서 적을 사살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다양한 최첨단 개인화기들이 개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볼트액션이라는 고전적 작동방식의 화기가 아직까지도 사랑받게 한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볼트액션도 단점이 존재하지 않은 완벽한 개인화기 작동방식은 아닙니다.

세계 1차대전 당시 중기관총의 도입으로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죽어야만 했고, 오늘날까지도 중기관총의 역할이 보병간 전투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것을 자동화기가 실제 전투시 볼트액션보다 더 유용하다는것은 굳이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답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1차대전 이후 많은 국가들이 분대 내 반자동 소총이나 자동화기의 숫자를 늘리려 한것은 화력에서의 우위가 승패를 가름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것을 알게 해준 1차대전 당시의 교훈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기술력이나 자동화기의 요구사항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함으로 이해 생긴 한계점으로 인해서 1차대전 당시 개발 및 사용이 되었던 중기관총이 아닌 자동화기들은 전반적으로 평가가 그리 좋지많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진행된것이 바로 반자동 소총의 새로운 장르였습니다. 물론 반자동 소총이라는 장르가 그 이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신 장르는 아닙니다만, 군용으로 쓰이는 소총들은 대게 볼트액션이 아니면 완전자동인 경우가 많았고, 만약 볼트액션보다 더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지만 복잡하고 무거우면서 반동이 센 자동소총의 룰을 대신할 수 있는 총을 고르라면 반자동 소총이라는 장르가 가장 적합한 물건이였다고 할 수 있지요. 실제로 1차대전 이후 나오기 시작한 개런드나 SVT-38/40, 그리고 G43가 군용 제식소총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건 반자동 소총의 실제 효율성이 인정을 받아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엔필드 소총과 빅커스 중기관총, 그리고 소수이지만 지급되었던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의 경우 1차대전 당시 다른 나라들과 병력의 무장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독일의 MP18이나 미국의 M1918 B.A.R 및 톰슨 기관단총의 개발은 강대국들이 분대내 자동화기의 숫자를 늘려 화력을 증강시키려는 노력을 한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영국은 이러한 자동화기가 아닌 반자동 화기 개발을 추진하였고, 그러한 결과물로 나온것이 바로 Farquhar-Hill 소총입니다.


일반적인 화기들이 개발을 거친다음 곧바로 군에 채용이 되거나 사정상 채용이 되지 않는것과 다르게 Farquhar-Hill 소총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 화기는 사실 세계 1차대전이 시작되기도 전인 1908년 5월 디자인과 시제품 생산이 완료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영국은 1908년, 미국은 1909년) 독특한 작동방식을 특허로 받은데다가 그 시점에서 영국군에게 테스트를 받는것이 원래 계획이였습니다만, 복잡한 구조로 인한 잔고장이 많아 영국군 소화기 위원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이후 몇가지 개량을 해서 다시 제출을 하였지만 이 역시 거부됨으로서 Farquhar-Hill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요(참고로 이 당시 영국군을 포함해서 미군에도 마찬가지로 테스트가 진행되었지만, 이 역시 거부당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Farquhar-Hill가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화기는 아닙니다. 비록 초기 시제품 테스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 이후 전선에서 반자동 화기의 필요성이 두각됨에 따라 영국군도 기존에 포기를 했던 이 제품에 대해서 재 테스트를 실시하였고, 복잡하다는 기존 평가와 다르게 최전선에서는 화력증강이라는 면에서 쓸모가 있다는 평을 받아 영국군 제식화기까지는 아니여도 점차 생산량을 늘려나가 영국군 전군에 대량보급을 할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성능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받았어도 실제 전선상황은 Farquhar-Hill에게 절호의 기회를 부여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전선에서 호평을 받아도 영국군이 이 화기를 영국 소화기 편제에 포함시키고 정식생산을 시작할 시기가 1차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8년도였고, 실제로 생산이 시작될 무렵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독일 제국과 바르사유 조약을 치루면서 더이상 반자동 소총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해당 화기에 대한 주문이 취소되었습니다. 이후 영국 공군의 2인승 전투기에 화력 증강을 위해서 배치가 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쓰인 양은 숫자는 상당히 소수였고, 2차대전 발발 이후에도 해당 화기에 대한 재 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P.S) 위키백과에 따르면 해당 화기는 자동발사가 가능한 자동소총으로 등장합니다만, 몇몇 소스에 따르면 실제 공개가 된 프로토타입이나 생산형은 다 반자동 사격만 가능한 녀석이라고 하기 때문에 본문이나 제목에 해당 화기를 자동화기가 아닌 반자동 화기로 표기하였습니다. 만약 반자동 화기가 아닌 실제 자동화기 버전이 존재한다면 차후 수정시 해당 내용을 추가하겠습니다.




본문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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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탄약: 7 x 57 mm / 6.5 x 55 mm / 7.92 x 57 mm / 7.62 x 54 mm R / 7.62 x 51 mm NATO / .303 브리티시
전체무게: 9.07 kg
전체길이: 1,143 mm
총열길이: 584 mm
장탄수: 25발, 30발, 40발 박스탄창
발사속도: 분당 450발



1차 세계대전 당시 보병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전차도, 독가스도 아닌 삼각대에 거치된 중기관총이였습니다. 진흙탕 범벅이 된 참호간의 평지를 건너는 병사들에게 적의 참호에서 날아오는 중기관총의 소리와 총알은 단순히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였고, 실제로 1차대전 당시 기관총으로 인해 죽은 사상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는것은 잘 거치된 중기관총 하나가 얼마나 전선에서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 뼈아픈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비록 1차대전 당시 참호전으로 인해 중기관총의 효율성이 입증된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기관총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화기였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게가 무겁고 운반하기 힘들다는 점은 중기관총이 교착화된 전선에서 쓸모가 있을지는 몰라도, 급박하게 바뀌는 전장의 상황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지는 못한 만큼 보병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준 중기관총이라는 물건도 나름 문제는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중기관총의 휴대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것이 바로 탄창 급탄식의 경기관총입니다.


탄창 급탄식의 경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기관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닌 독자적으로 개발된 녀석이기 때문에 중기관총이 가질 수 없는 무게와 운용방식의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중기관총이 전선이 앞으로 움직이면 보병들과 같이 움직이며 지원사격을 할 수 없지만 경기관총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전선이 후퇴할 시에는 중기관총은 최악의 상황시 버리고 도망가야 하지만 경기관총은 보병들과 같이 후퇴하며 엄호사격을 한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경기관총은 1차대전 당시 그리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는 경기관총의 특성상 쉽게 과열된다는 점과 탄창을 급탄방식으로 쓰기 때문에 지속사격을 하기가 힘들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당시 나온 경기관총들의 경우 너무 무거워서 경기관총이라고 부르기 어렵거나 내구성의 문제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녀석들중 그나마 평가가 좋았던 화기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마드센 경기관총입니다.


덴마크에서 만들어진 마드센 경기관총은 오늘날 잘 알려진 경기관총들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 가장 독특한 특징이 바로 작동방식입니다. 현대 개인화기들의 경우 반동작동식을 사용한다면 쇼트 리코일이나 롱 리코일 둘 중 하나를 사용하는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마드센은 이 두 방식을 조합한 작동방식을 채택헀다는 점이 상당히 희한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레버액션용으로 개발되어진 볼트를 사용한다는 점은 마드센이 그 당시 나온 단순한 경기관총들과 다르게 상당히 복잡하면서 정교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화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실제로 마드센에서 쓰인 작동방식은 마드센을 제외하고는 완벽하게 똑같이 쓰인 기록이 없습니다).

마드센의 경우 군용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실용적 경기관총으로서 덴마크군에 1902년 채택된 이후 덴마크군의 제식 경기관총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덴마크군을 제외하고도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마드센의 탄창 급탄방식을 높게 평가하며 채용하였고,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쓰인 명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노르웨이군의 경우 2차대전 당시 쓰인 마드센의 경우 내구성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 만큼 절대적으로 좋은 물건은 아닙니다). 마드센의 경우 이후 현대형 기관총들이 속속 등장함으로서 대부분의 국가들의 제식 자리에서 내려오기는 합니다만, 아직도 많은 수가 예비로 비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최근 브라질군이 공여한 마드센을 브라질 경찰이 개조하여 사용한 기록도 존재합니다.



본문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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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26 23:25 신고

    mad(미친)
    sen?

  2. 2012.10.28 18:53 신고

    메드센하면 1930년대가 주로 생각나는... 1차대전 이후 2차대전 초반정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종종 본것 같습니다.

 

 

사용탄약: 7.92 x 57 mm 마우저
전체무게: 10.5 kg
전체길이: 1,150 mm
총열길이: 672 mm
장탄수: 20발 박스탄창
발사속도: 분당 500발




참호전이라고 불렸던 세계 1차대전은 최초로 기관총이 엄청난 양으로 쓰이고, 그 엄청난 양으로 인해 수백만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첫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기관총은 여럿 전쟁에서 쓰이긴 했지만,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양상의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세계 1차대전은 전투의 특징과 기관총의 장점이 잘 맞아 떨어지게 되었고, 이는 이후 거의 모든 전쟁에서 기관총이라는 존재는 더이상 옵션이 아닌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지요. 사실상 세계 1차대전 이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은 제식 기관총을 적어도 1개 이상은 보유하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됨으로서 기관총이라는 장르가 얼마나 전투에서 효과적인지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1차대전의 경우 기관총이라는 장르가 대세였다고 하긴 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수냉식 기관총에 국한된 이야기로서 1차대전 당시 경기관총(혹은 공랭식 기관총)은 세계 2차대전 당시 주목을 받았던 경기관총의 중요성과 다르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경기관총의 경우 수냉식 기관총이 가질 수 없는 무게와 운용방식의 장점을 가지고 있긴 했습니다만, 죽치고 앉아서 총열이 과열되도록 쏘는것이 일반적이였던 1차대전 당시 전투 양상과 비교했을때 수냉식 기관총은 공랭식 기관총을 압도하는 우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2차대전까지 공랭식이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계 1차대전 당시 경기관총들은 모두 묻혔다고 하는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비록 공냉식 기관총이 수냉식 기관총에 비해 지속 사격률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지만 1차대전 이후 참호전이 아닌 전투의 비율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무겁고 운반하기 힘든 수냉식보다는 가볍고 운반하기 쉬우면서 다수의 인원이 필요하지 않은 공랭식 기관총의 중요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공냉식 기관총의 대표주자로 나온 녀석중 하나가 세계 1차대전 이후 체코군에 의해 채택된 ZB vz.26입니다.

Zb.26은 세계 2차대전이나 그 이전에 등장한 경기관총들과 큰 차이가 없는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탄창의 위치와 탄창의 작동방식이 다른 경기관총들과 큰 차이를 보이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기관총들의 경우 탄창이 아래서 위로 급탄되는것이 일반적이고, 그리 자주 보이진 않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옆에서 약실로 급탄되는 탄창을 사용하는 경기관총도 몇몇 나온적이 있는데, 무거운 소총탄을 사용하는 만큼 옆이나 밑에서 급탄되는 탄창들의 경우 탄창의 급탄불량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탄창을 최대한 품질이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한계점이 있었지만, 다소 약한 스프링을 사용해도 큰 문제가 없이 급탄이 가능했다는 점은 Zb.26가 다른 경기관총들보다 훨씬 더 고장이 덜할 수 있다는 장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지요.


물론 탄창이 위에서 급탄된다는 점이 zb.26의 유일한 장점은 아닙니다. 세계 2차대전 이전에 개발된 개인화기 치고는 상당히 사수에 대한 배려가 높으면서(개머리판에 반동을 줄이기 위한 어깨 받침대가 있다던지, 총열 밑에 잡을 손잡이 대신에 열로부터 최대한 떨어진 부분에 총열 교환용 수직그립을 설치했다던지 등등) 총 자체도 신뢰성이 상당히 높기로 소문난데다가 무게도 다른 경기관총들과 비슷한 수준(하지만 수냉식 기관총들보다는 훨씬 가볍다는 점) 덕분에 체코군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 합병된 이후에는 독일국방군이 MG 26(t)라는 이름으로 제식명을 부여하면서 섰고, 영국군이나 일본군의 경우 2차대전 당시 zb.26을 기반으로 자국산 경기관총을 만들어 제식으로 사용한 만큼 zb.26은 2차대전 당시 경기관총 역사에 나름 큰 영향을 끼친 물건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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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4.12 16:14 신고

    묘하게 간지난다, 탄창 위에 달린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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